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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_브루노(Bruno) 10월 6일

moses-lee 2012. 10. 6. 07:44

브루노(Bruno) 10 6

신부, 설립자인 브루노는  1032?-1101년까지 활동한 성인이다.

 

성 브루노는 독일 쾰른(Kol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쿠니베르투스(Cunibertus) 학교를 거쳐 프랑스의 랭스(Reims)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 와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시 1056년에 랭스로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 107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때 그는 성직매매로 랭스의 주교좌를 획득했던 자신의 대주교 마나세(Manasses)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성 브루노는 그를 고발하고 그의 직책에서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성취하였으며, 이를 눈여겨 본 랭스의 교구민들이 그를 대주교로 원하였으나 그는 은수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는 1082년 마침내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 29)의 지도하에 은수자가 되었지만, 1084년에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그르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후고(Hugo)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에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활하였다. 이것이 곧 카르투지오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였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1090년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Urbanus II, 7 29)의 부름을 받고 로마(Roma)로 갔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개혁 등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는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에 정착한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칠리아(Sicilia) 섬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 Torr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Paulus)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Gregorius XV)에 의해 축일이 10 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Clemens X)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