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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_요사팟 쿤체빅(Josaphat Kuncevyc) 11월 12일

moses-lee 2012. 11. 12. 08:20

요사팟 쿤체빅(Josaphat Kuncevyc) 11 12

 

대주교로서 순교자이다 1580?-1623년대에 폴로츠크(Polotsk)에서 활동했으며

요사파트라고도 부른다.

 

성 요사팟 쿤체빅은 1580년경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던 때로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대립한 상황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고,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볼로디미르에서 학교를 마친 그는 부모의 가업을 잇고자 상업을 배우기 위해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포포빅(Popovyc)이라는 사람의 도제로 보내졌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주인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빌나에 있는 바실리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요사팟 쿤체빅은 1609년에 비잔틴 전례에 따라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즉시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친구 루트스키(Benjamin Rutsky)는 삼위일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 11 12일 비테프스크(Vitebsk)의 주교로 임명된 요사팟 쿤체빅은 그 이듬해에 폴로츠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고 교회일치를 위해 더욱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문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고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도 크게 성장하였다.

 

이즈음에 그와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분리파 주교들이 요사팟 쿤체빅은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리투아니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테프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1623 11 12일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Dvina) 강에 던져졌다.

교회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인해일치의 사도로 불리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의 사망 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그의 전구로 인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1643 5 16일 교황 우르바누스 8(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7 6 29일 교황 비오 9(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