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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베드로 가니시오(PETER CANISIUS) 12월21일

moses-lee 2012. 12. 21. 08:07

 

베드로 가니시오(PETER CANISIUS) 1221

 
PETER CANISIUS
신학자
12.21
1521년 -1597년

네델란드 니멘겐에서 9차례나 선출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베드로 카니스(애 칭)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쾰른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파브르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6 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설교는 곧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트렌트 공의 회의 두 회기에 참석하였고,

성 이냐시오가 메씨나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번째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바바리아의 월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 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를 요청하므로, 그는 1549년 에 인골슈탓트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비엔나에서도 하였는데, 그의 명성은 이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가니시오는 프로테스탄트를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므로,

이제 그는 같은 주제에 대하여 저술을 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교리서 첫판을 발간하자 큰 선풍을 일으 켜, 즉시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또 1556년에 프라그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하여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 그 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 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였으며,

여러 개 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그는 아우그 스부르그에 있었다.

그는 아주 정렬적인 사람이었으니,

30년 동안 도보로 혹 은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선교한 사람이다.

후일 그는 딜린겐, 인 스부룩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그에서 교육에 전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을 할만큼, 트렌트 공의회를 연이어 일어난 가 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의 논객들 가운데 서

가장 예의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 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을 감지하였으므로,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레오()의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예로니모의 편지를 비롯하여 순교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 등등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925년에 시성되었으며,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