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이(高順伊)바르바라는 1801년에 순교한 高光晟의 딸로서 1798년에 출생하였는 데 지조가 굳고 지력이 출중하였다. 아버지가 피로써 증명한 신앙에 전심으로 심취 한바르바라는 18세에 朴宗源 아우구스띠노와 결혼한 후 자녀 셋을 낳아 가정을 자녀 교육과 신심의 요람이 되는 모범가정으로 꾸몄다. 남편의 자선 사업을 도와주며 자신도 냉담자 권면에 힘썼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자 병자 들을 전심으로 간호하였다. 선교 신부들이 들어온 후에는 성사를 받고 더 큰 은총의 힘으로 분발하였다. 남편 박아우구스띠노가 붙잡혀 갔을 때에 고바르 바라는 남편과 괴로움을 같이 당하기 위하여 자수할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그의 소원을 앞질렀으니 그 다음날 즉 1839년 10월 26일에 그녀를 잡아 가두었다. 바르바라는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고? 나는 천주를 위하 여 치명함으로써 그분과 사과하련다"고 말하였다. 부부는 포청에서 서로 만나 그 은혜를 주님께 감사하고 서로 축복하며 고통의 새로운 길을 꿋꿋하게 걸어 가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포장은 그들을 함께 불러 내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이 배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둘이 다 그것을 거절하므로 또 같은 형벌을 내렸다. 계속하여 여섯 차례를 어떻게나 잔인하게 고문하였던지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굳센 정신을 주셨음으로 마음 의 평온은 조금도 잃지 않았다. 열흘 뒤에 그들은 다시 형조로 끌려가 새로운 고문을 받았는데 너무나 심하게 매를 맞아 살이 떨어져 나가기 까지 하였다. 그는 순교하기를 절원하여 죽을 임시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 다. "전에는 순교 이야기만 들어도 벌벌 떨렸는데, 성신께서 나같은 죄인을 은총으로 감싸주시어 지금은 아무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기쁘기만 합니다. 나 는 죽는 것이 이다지도 쉬운줄 몰랐습니다." 바르바라는 사형집행일로 정하여 진 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를 손꼽아 가며 고대하다가 다른 6명의 신자와 함 께 42세로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