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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단_77년 전 첫 마음 그대로 "복사 설 때 가장 행복"(90살 유근혁 베드로 옹)

moses-lee 2013. 1. 30. 10:00

 

77년 전 첫 마음 그대로 "복사 설 때 가장 행복"

 

90살에 복사 서는 유근혁(베드로)

 ▼ 사진을 찍자고 하자 유근혁옹은 얼른 렌하르트 신부 사진을 꺼내들었다.

렌하르트 신부는 유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1936년 연길교구 명월구성당(지금의 안도성당).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12살 소년이

떨리는 표정으로 복사를 섰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13 1 3,

인천교구 연희동본당(주임 김성훈 신부) 평일미사에서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제대 옆에 서서

주례 신부의 미사 집전을 정성스럽게 거들었다.

77년 전 복사를 섰던 그 소년이었다.

 올해 아흔 살이 된 유근혁(베드로)옹은 주위 사람들에게

"지금도 복사는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10일 자택에서 만난 유옹은 "복사를 설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해맑게 웃었다.

 복사 경력이 무려 일흔 일곱해다.

나이가 들면서 귀가 어두워져 바로 옆 사람이 하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복사를 서면서 실수를 한 적은 거의 없다.

사제의 손동작 하나 하나부터 시작해 모든 전례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옹을 복사의 길로 이끌어준 이는

고 렌하르트(1905~2003, 성 베네딕도회, 한국명 노도주) 신부다.

연길에서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이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는

친구가 갖고 있던 교리문답 책을 빌려보면서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교장이던 렌하르트 신부는 그에게 세례를 주고 복사교육을 시켰다.

 유옹은 말이 서툴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과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인터뷰도 아들 유정열(가리노)씨가 옆에서 통역(?)을 해준 덕분에 겨우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 유옹을 렌하르트 신부는 따뜻하게 감싸며 격려해줬다.

 "렌하르트 신부님은 언제나 친절하셨어요. 미사 전례도 자세히 가르쳐 주셨죠.

해방 이후에 한국에 다시 돌아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7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갔어요.

제가 복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신부님께 늘 감사드리며 살고 있어요.

지금도 제대 옆에 서면 정말 행복해요."

 유옹은 본당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다들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보는 건 아니다.

성물을 옮기는 모습이 불안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걸을 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불안해 보인다고 수군대는 이들도 있다.

 아들과 며느리도 "이제 복사는 그만 하셔도 될 것 같다"고 수차례 말했지만

유옹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유옹은 오전에 평일미사가 있는 날이면 한 시간 전부터 성당에 가서 맨 앞자리에 앉는다.

복사를 서기로 한 사람이 갑작스레 사정이 생겨 못 오기라도 하면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복사복으로 갈아입는다.

 유옹은 "죽는 날까지 복사를 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것만큼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은 없다.

올해 소망을 묻자 "지난해보다 복사를 더 많이 서는 것"이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복사를 서는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신부님 옆에서 미사를 도와드리면 정말 좋아요.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기도할 거예요. 저는 성부 성자 성신(성령)이 좋아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복사로 활동을 하고 싶어요."
임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