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_[부부 이야기](5) 33주년 결혼기념일
[부부 이야기](5) 33주년 결혼기념일
가슴 찡하도록 행복했던 진짜 이유는
며칠 전 33주년 결혼기념일을 지냈습니다.
33주년이어서 그런지 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보았던
"부부란 3개월 사랑하고 3년을 싸우고 30년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지나온 긴 세월을 되돌려 생각해봤습니다.
그 옛날 연애시절, 만난 지 100일이 되었다고 특별한 행사 준비를 하면서부터 시작된
'기념일 헤아리기'는 언제나 남편인 저의 몫이었습니다.
첫 만남의 날, 결혼기념일 등을 기억해 내고 뭔가 특별하게 하루를 지내고 싶어하는
저를 보면서 우리 부부는 남녀가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철저하게 기념일을 잊어버리곤 했기에 저는 화가 났습니다.
남자가 속좁게 기념일 타령이나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는 것은 싫었습니다.
오히려 아내가 기념일을 신경쓰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통 큰 남자'가 되려고 의도적으로 기념일을 잊은 척 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결혼기념일, 아내와 함께 저녁미사를 드리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단둘이 식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속을 하려 했더니 아내는 미처 결혼기념일을 생각하지 못했고,
결혼생활에 위기를 맞은 한 부인을 만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 부부에게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부부에게 위기가 왔으니
우리 문제부터 먼저 상담하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혼자서 저녁미사를 참례했습니다.
나오는 길 명동성당 언덕 바람은 왜 이리도 차가운가 싶었고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다시는 기념일 타령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시 한 편을 선물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아내가 먼저 기념일을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금년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내는 약속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 기념일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낼 거라 생각해
회사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역할이 바뀌어 화를 내야할 아내는 덤덤하게 "그럼 됐다"고 했습니다.
기념일 하루 전 저녁, 출가한 딸이 사위와 손자와 함께 찾아왔고
우리는 아파트 안에 있는 상점에서 사온 초콜릿이 입혀진 빵을 몇개 쌓아놓고
촛불을 불었습니다.
가슴이 찡하도록 행복했습니다.
이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을 때보다 더 행복했던 이유는
며칠 후 미사 강론 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단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손세공·배금자 부부(포콜라레 새가정운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