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흡(崔昌洽 )서울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에 이어서 수많은 처형이 있었기 에 정부는 신자들이 공포에 질리고 옥살이의 괴로움에 지쳐서 쉽게 굴복하리라는 희 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신 은총으로 이 계산은 빗나갔으니 배교는 기 대한 것보다 훨씬 적었고 감옥도 별로 비워지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난 뒤에 새로운 형집행이 결의 되어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모든 신자들이 이 특혜를 받았으면 했으나 여러사람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기 전 에 많은 고뇌 속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만 하였다. 이 영광스러운 무리의 으뜸은 신유박해(1801년)때의 초기 순교자들 중의 한 살람인 최창현(요한)의 아우 최창흡 베드로였다. 최창흡 베드로는 서울 태생으로 처음 박해가 일어나 기 전까지 여러가지 공직의 영예를 누린 중인 계급 출신이다. 열세살 때에 아 버지를 여의고 몇해 동안을 신자들과 떨어져 어느정도 냉담한 생활을 하다가 1815년 경에 다시 사람과 잘 지냈으며 우러러 볼 만한 겸손을 지닌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착한 일만을 볼줄 알고, 또 마음속으로 자기를 누구보다 도 못한 사람이라 생각하였다. 지난날의 자기 생활이 언제나 마음에 무겁게 걸리고 순교만이 자기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순 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 안의 출신인 손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 하여 자녀열한명을 낳았으나 아홉명은 어려서 죽었다. 1821년 콜레라가 매우 무섭게 휩쓸던 해에 다른 많은 예비신 자들과 같이 세례를 받고 그때부터는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나가 선교사 들이 서울에 들어왔을때에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자녀 중에 최영이 바르바라는 부모의 열심한 모범을 따라 어려서부터 그 열심과 교 리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이와같이 열심히 살아가던 최베드로와 그의 가족은 6월에 함께 잡혀 포도대장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 극히 혹독한 신문을 당하였다. 신문중에 포장은 최베드로에게 "네가 사도를 행하느냐?"고 묻자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 습니다. 그리고 과연 천주교를 믿습니다." "천주교를 배반하라." "못합니다." "언제부터 그 교를 믿었느냐?" "어려서부터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자 포졸들은 모두 "이놈은 그 교의 늙은 괴수로구나"하고 소리지르며 그를 욕하였다. 최베 드로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태형을 당하였으나 배교도 아니하고 신자를 고발 하지도 않았다. 형조로 옮겨 가서도 같은 형벌과 또 매우 혹독한 장형을 당하 였으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한결같은 용기로 참아받았다. 이러한 용기를 보 이자 바로 그 날로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최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옥졸 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 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님께 감사하며 잊 지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하고 말하였다. 최베드로는 옥에 갇힌지 7개월 후인 12월 29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이 아내 손 막달레나와 딸 최영이 바르바라는 그의 말대로 주님을 찬미하 고 고통을 받으며 지내다가 2개월 후에 53세의 나이로 그의 뒤를 따라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