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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_조증이 바르바라(BARBARA JO)12월 29일

moses-lee 2012. 12. 29. 12:45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 JO)12월 29일
 
BARBARA JO
한국성인
12.29
1839년 12월 29일 참수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는 명문가의 딸로서 1781년에 태어나서 16세에 남이관(南履
灌)세바스띠아노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아니되어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천주교의 규칙을 충실히 지켜다. 1801년
신유박해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으며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갔는데,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분도 없었
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는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허송
한 세월을 보속하고자 상경하여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 열심히 살았
다.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울로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
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
양지에서 돌아오자 남편과 함께 劉方濟 빠치피꼬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
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경당을 마련하여 신앙생활에 편리를 도모하였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범주교를 그 집에 영접하였다. 조바르바라는 가
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터이니, 천주
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 준비
를 하자." 이것은 빈 말이 아니고 그의 행동과 말이 일치해 있었다. 남편이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기 때문에 바르바라는 7월에 혼자 붙잡혔다. 그는 그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잠복소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
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번 죽어도 나의 천주를
배반할 수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하였다. 몇
주일 동안 같은 문제에 대해서 문초를 당했다.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네 교
를 배반하고 동교인을 대든지 두가지 중에 한가지를 택해야 할 터이니 잘 생
각해 보아라."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만번 죽을지언정 죄를 하나도
범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 가서도 다시 세차례나 곤
장을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사형집행일이 되자 옥
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가 죽는 것 그 자체도 섭섭하게 생각하였지만
그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것을 더욱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
에 나가기 전에 그를 둘러싼 신자들에게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58세의나이로 형장으로 나아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