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성인_현경련 베네딕따(BENEDICTA HYUN) 12월 29일

moses-lee 2012. 12. 29. 12:47

현경련 베네딕따(BENEDICTA HYUN)
 
BENEDICTA HYUN
한국성인
12.29
1839년 12월 29일 참수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따는 샤스땅신부의 복사 현석문 까롤로의 누이로 역관 집안
출신이며 아버지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이다. 그녀는 동생 까롤로와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또 박해로 인하여 자주 이사를 다
니지 않으면 안되어, 어려서부터 그녀가 당해야 했던 모든 시련을 이야기하기
는 어려울 것이다. 그녀가 17세 되었을 때 영광스런 순교자 최창원의 아들과
1911년에 혼인하였는데 3년후에 남편을 여의고 자녀가 없었으므로 친정 어머
니에 게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왔다. 그녀는 미천한 처지에 있으면서
도 행복하고 조용하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며 자기 영혼사정을 돌볼 길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천주께서는 더 쉽게 당신을 섬기고 내영혼을
구하게 하려 하셨다" 고 종종 말하며 주님을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이 경건한
집안의 완전한 화목과 규칙적인 생활을 감탄하였는데, 기도와 묵상과 독서를
정한 시간에 하였고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냉담하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현베네딕따는 바느질을 해서 생기는 약간의 돈을 한 푼도 제
몫으로 따로 떼어놓지 않고 집안을 위해서 내어 놓았으며 자기 개인의 성화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른 이의 성화
를 위해서도 힘썼으며, 냉담자들을 권면하였고, 근심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하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죽을위험을 당한 비신자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줄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선교신부들의 순희 시기가 되면 신자들을 자기
집에 모아가지고 할수 있는 대로 성사받을 준비를 시키곤 하였다. 베네딕따는
신자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 활동과 열심한 생활을 했기에 박해가 일어나자 제
일 먼저 고발된 사람들 중에 들었다. 얼마 동안은 숨어지냈으나, 6월에 그녀
가 숨어있는 곳이 알려져 마침내 포졸들에 의해서 붙잡히게 되었다. 정부에서
는 현베네딕따의 동생인 까롤로가 서양인 신부의 충복인줄 아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숨은 곳을 누이를 통해 알아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베네디따는
그만큼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하였다. 그녀는 여덟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
고 또 선교사를 체포하는 자에게 현상금을 준다고 하였기 때문에 현상금을 탈
목적으로 포졸들은 저희들 마음대로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베네딕
따의 굳고 참을성 있는 결심으로 그들의 증오와 탐욕에서 나온 횡포는 허사가
되었고 선교사들에 관한 정보는 한마디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8월에 형조로
옮겨진 그녀는 형조에서 어떻게나 혹독하게 맞았던지 몸은 갈기갈기 찢겨졌
고, 상처에서는 피와 고름이 흘러내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때 설상가상으로 오랫동안 맹위를 떨치던 염병에 걸려 그녀의 괴로움은 한층
더 심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뜻을 굽힐줄 몰랐다. 편지는 보존되지 않았으나
현베네딕따는 옥중에서 동생 까롤로(1846년에 순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신
자들은 그것을 읽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형관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
하였고 관례의 태장을 맞은 후 다시 옥에 갇혀서 사형 집행일을 기다렸다. 사
형 집행일이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지닌채 사
형집행의 시간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평안하고 고요하게 잠을 자고 난 다음에
영원한 복락의 시작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형장을 향하여 잔치에 나가
듯 기쁜 마음으로 나가 순교의 칼을 받으니 그녀의 나이 46세로 주님의 영원
한 영광을 받았다.